해인 조국일 화백의 ‘수묵채색화의 재해석’을 만나다

수산종자 생산기술·시인·언론인 등 다양한 경력의 예술인

최재경 기자 | 입력 : 2020/11/04 [17:54]

 

해인 조국일 화백의 수묵채색화의 재해석을 만나다

수산종자 생산기술·시인·언론인 등 다양한 경력의 예술인

 

[목포뉴스/신안신문] 지난 1024일부터 30일까지 목포원도심 노라노미술관에서 수묵채색화의 재해석이라는 주제로 해인 조국일 화백의 개인전이 열렸다.

 

조국일 화백은 몇 차례의 단체전 등을 국내외에서 가졌지만 이번 전시가 한국에서는 첫 개인전이다.

   

▲ 조국일 화백     ©목포뉴스/신안신문

 

 

조화백의 전시회가 열린 곳은 한때 한국의 패션계를 이끌었던 목포 노라노 패션 양재학원건물이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탈바꿈해서 100년도 넘는 역사를 가진 건축의 특성을 그대로 살린 내부와 40점의 다양한 작품이 마치 한 세트 같아서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평생을 스승 없이 홀로 걸어온 그의 그림세계의 색()과 선()과 면()은 여느 화가들과는 매우 차별적이며 몽환적이다.

 

그는 강력한 선과 색채를 사용하면서도 채도를 낮춰서 오래도록 질리지 않는 편안한 그림을 그린다. 때로는 진묵(眞墨)으로 배경을 깔고 그 위에 온갖 자연재료를 이용하여 전통화를 복원하는 기법도 독특하다.

 

황토와 갯펄 진흙, 나무판자 등을 이용해서 자유분방한 재료기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장지나 한지에 거침없는 필을 사용하여 대관산수도나 몽유산수도를 자유자재로 표현하기도 한다.

 

▲ 조국일 화백 전시작품     © 목포뉴스/신안신문

 

종교화와 인물화에도 관심을 보인 그는 불교와 기독교를 공부하여 다양한 예불화, 성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동음이자(同音異字)를 변형한 전통 기복화(傳統 祈福畵)를 재료와 기법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작품 창작에도 탁월하다.

 

▲ 조국일 화백     © 목포뉴스/신안신문

 

조국일 화백의 인생 경력은 참 다양하다. 학부 때는 정치학을 전공하고, 정치인을 따라다니면서 정치를 꿈꾸던 청년이었으나, 이후에는 경영학 박사가 되어 모 대학에서 금융학을 10년 넘게 강의를 한 경험도 있다.

 

그 와중에 해양생물공학을 공부하여 수산신지식인이 되었고, 수산업에 종사하여 우리나라 해양저서생물 종자생산에 독보적 기술을 보유한 수산종자 생산기술자이다.

 

또한 글을 쓰기 시작하여 문학지에 등단해서 시인이 되었고, 지금은 목포뉴스·신안신문·폭로닷컴의 총괄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는 언론인이기도 하다.

 

▲ 노라노 미술관 입구에서 관람객을 기다리는 조 화백     ©목포뉴스/신안신문

 

그가 장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붓을 들기 시작한 이유는 사업 차 수년 간 중국을 오가면서 만난 중국 화가들과의 사적인 교류를 통해서다.

 

조 화백은 한국화를 중국의 변방그림 정도로 치부하는 중국 화가들에게 화가 났지만 부끄럽게 생각했다고 말하며 편견을 부수기 위해 중국에서 창작공간을 마련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잠재되어왔던 재능이 서서히 발현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중국에서 작품활동 당시 중국 작가들과 기싸움도 벌였다고 한다.

 

조화백은 어느 날은 중국 화가가 즉석에서 같이 그려보자면서 기세등등하게 왔다가 자신의 거침없는 붓놀림에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당시 중국 작가들의 한국화를 바라보는 시건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지역의 유지가 무료로 산수화를 부탁하자, 조화백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예를 표하려면 정중한 부탁이 있어야 한다고 호통 치자, 곧바로 용서를 구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방문하기도 했다는 일화를 이야기 하며 미소를 지었다.

 

 

▲ 조국일 작가 뒷편 작품 '만선지몽'     ©목포뉴스/신안신문

 

조화백과의 인터뷰 도중에 그림을 그리는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질문했다.

 

이에 조국일 화백은 누구나 그림을 그리고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지만, 그리는 자의 정신(精神)과 정성(精誠)과 정취(情趣)가 녹아있어야 비로소 작품으로 타인에게 진실하게 호소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며 때문에 끊임없이 나를 닦아내고, 깎아내고, 다듬어 가면서 완성을 향한 즐거움을 찾기 위한 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조화백과 대화와 전시회 작품을 통해 미술에 대한 강한 열망이 엿볼 수 있었으며, 평생 창작활동을 이어가리라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조국일 화백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털어놓은 독백 같은 그의 자작시를 소개하며 지면을 맺는다.

 

▲ 인터뷰 중 노라노 미술관을 바라 보는 조 화백     ©목포뉴스/신안신문

 

 

작가의 변 (作家)

 

해인 조국일

 

 

때로는 외롭고 고독하며 때로는 환희에 차 있었으며 가끔은 무모한 삶을 살았다.

 

언젠가부터 누군가의 삶이 강철처럼 단단하고 묵직해진 것을 보았을 때

나도 그 만큼의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담금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실컷 두드려 맞아서 깨지고 시퍼렇게 멍든 것조차도 삶의 훈장이라고 으스댔으나

어느덧 내 한쪽 날개는 부러졌고 떨어지지 않으려 남은 한쪽을 힘차게 흔들어댔다.

어쩌면 떨어지거나 어쩌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자만하면서...

 

그렇게 힘겨운 세월이 한장 한장 넘어갈 때 그 상처 위에 새긴 그림은 어느덧 내 삶이 되어

아물거나 덧나거나 곪거나 새살이 돋거나 어떻게든 끝은 볼 것이다.

 

지나온 길을 후회하고, 지나가는 길 위에서 머뭇거리며, 지나갈 길을 두려워하는

환쟁이로 살다가 끄적거리며 소소한 흔적을 남기는 그것이

가장 소중한 내 인생이라고 내가 나에게 말했다.

 

아직도 나는 무모하다...

        

 

* 편집자 주 - 노라노 미술관은 목포원도심 마인계터로에 위하며, 목포개항과 연도가 같은 1897년에 목포 최초의 우체사로 활용했던 곳이며, 조선시대에 공무(公務)로 사용하던 파발마(擺撥馬)나 기타 지방으로 소식을 전하는 통신용으로 사용하던 말을 키우고 관리하던 마방(馬房)골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1897(光武 元年) 12월에 조정의 명으로 이곳에 우체사(郵遞司)를 설립하였고, 이듬해인 18982월에 전보사(電報司)를 개설하여 운영하였던 곳이다. 우편과 전보의 발달은 근대 문물의 상징이기에 목포 근대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방이후 노라노 패션 양재학원으로 운영되어왔으며,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지난 2015년부터 전시관 및 미술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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